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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어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메카럽 2020. 12. 25. 12:07

안녕하세요. 메카럽입니다.

이번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집콕 크리스마스가 되어서 아쉽고 속상하지만 나름대로 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도 의미있고 뜻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Christmas)의 어원과 장식들의 유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크리스마스(Christmas)의 어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기념일인 크리스마스는 영어로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의 의미이며 <X-MAS>라고 쓰는 경우의 X는 그리스어인 그리스도(크리스토스) XPIΣTOΣ의 첫 글자를 이용한 방법입니다. 프랑스에서는 노엘(Noël), 이탈리아에서는 나탈레(Natale), 독일에서는 바이나흐텐(Weihnachten)이라고 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1225일을 <크리스마스 데이>, 그 전야를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Christmas)의 기원

신약성서에는 마리아의 처녀 회임으로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으나 그날이 언제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 교도는 11, 16, 327일 등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였는데, 교회로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3세기의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크리스마스를 정하는 것은 이교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가 1225일로 고정되고, 본격적으로 축하하게 된 것은 교황 율리우스 1(재위 337~352)때이며, 동세기 말에는 그리스도교 국가 전체에서 이날에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논의 끝에 크리스마스가 1225일로 고정된 것은 초기 교회 교부들의 체험과 영지에 의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에 큰 축제를 행하는 것은 고대 시대의 사회의 습관이었는데요. 그중에서도 요람기의 그리스도 교회가 개종을 원하였던 로마인이나 게르만인 사이에는 동지 제사가 성대하게 행하여졌는데 창고에는 수확된 곡물이 가득 차 있었으며 목초가 부족한 겨울을 대비해서 도살한 가축의 고기도 충분히 저장되어 있어 1년 동안의 힘든 노동에서 해방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이 시기, 사람들은 이어서 찾아올 식량부족을 잊고, 먹고 마시는 성대한 축제를 행하였습니다.

 

생명의 은혜를 준 태양의 힘을 약화시키고, 겨울을 가져올 자연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공물을 바치고, 풍작풍요를 기원해서 불을 피웠으며 온 세상의 초목이 메마를 때 푸르름을 유지하는 상록수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서 장식되었습니다.

게르만인의 동지의 축제 율에 대해서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로마인의 동지의 축제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문학회화조각 등에 남아 있는데 1225일은 로마의 동지로 그날은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으로서 3~4세기의 로마에 보급된 미트라스교의 중요한 제일이었다고 합니다.

사투르날리아(농경신의 날)을 표현한 조각가 Ernesto Biondi의 1909년 작품. Buenos Aires Botanical Gardens에 소장

1217일부터 24일까지는 사투르날리아라고 불리는 농경신 사투르누스의 제사가 행하여졌는데요. 이 기간에는 집집마다 밝게 불이 켜지고, 상록수가 장식되었으며 선물이 교환되고 남자들은 여자의 의복이나 동물가죽 등을 두르고, 보통은 금지되어 있던 행위가 행하여졌는데 주인과 노예가 자리를 교환하는 소동도 행하여졌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로마의 사투르날리아와 게르만의 율 축제의 시기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로서 선택되었습니다. 교회는 기존의 제일을 가능한 한 이용할 것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트라스교는 그리스도교의 강적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보다 앞서 유사점이 많은 미트라스교와의 습합을 고려, 321년에는 매주 휴일을 <태양의 날(dies solis=sun day)>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중세시대 크리스마스(Christmas)

597,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영국 전도를 개시했을 때, 크리스마스는 로마교회의 3대 축일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듬해 크리스마스에 1만명 이상의 앵글로 색슨인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1세기 후, 베다는 이 날이 원래 <어머니들의 밤>이라고 불리며, 어머니인 여신의 축일이었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개종해도 관대한 교회의 자비에 의해서 죄 없는 이교의 축제를 즐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상록수로 장식하고 율의 통나무를 태우고, 가면극이나 주술적인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는데요. 이와 같이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율과 탄생절의 습합으로서 성립하고, 앵글로 색슨력은 이날부터 신년을 기산하게 되었으며 이런 관습은 중세 말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알프레드 대왕은 크리스마스에서 공현제까지를 성스러운 기간으로 정하고, 노동을 금하였는데 왕이 878년 데인에게 일시적으로 패배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위의 기간이 성스러운 기간으로 정해진 것은 567년의 투르(Tours) 공의회에서인데요. 앵글로 색슨인의 그리스도교화는 데인인의 침략에 의해서 지체하거나 후퇴하였는데, <노르망 콘퀘스트>까지에는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용어는 앵글로 색슨 연대기1043년의 항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그 이전에는 <동지제> 또는 탄생을 의미하는 <nativity>라는 말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 이후의 크리스마스(Christmas)

헨리 8,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에도 크리스마스는 잉글랜드 교회의 3대축일의 하나로서 축하되었습니다. 당시의 문학작품 등에 의하면 크리스마스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시간, 진정한 기쁨의 시간, 친구친척과 정을 돈독히 하고, 가난한 이웃을 환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대는 궁정생활의 화려함에 비해서 지방에서는 빈부의 차가 심화되어 과거의 인간관계가 붕괴되기 시작한 시대였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가난한 이웃을 환대하라는 문구가 저술가들에게 특히 강조되었으며 엘리자베스 1, 제임스 1세는 고향사람들을 환대하도록 크리스마스에는 신하들을 귀성시켰습니다.

지방자치체는 귀족젠틀리에게 이 환대를 의무 지웠는데 특히 흉작일 때는 그것이 지방의 치안유지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1627년의 크리스마스에 추밀원은 런던 주교에게 영국에 망명해온 프랑스의 신교도 구제를 위해서 주교구 전체에서 기부금을 모으도록 명령하고, 크리스마스 정신을 간청했습니다.


퓨리탄 혁명시대의 크리스마스(Christmas)

왕당파와 영국 교회는 즐거운 전통적 습관을 상징하는 날로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했으나 근엄한 퓨리탄은 이 날을 로마 가톨릭의 축일로서 비난하고, 폭음폭식, 댄스, 도박, 대소동 등 악으로 연결되는 축제로서 공격했습니다. 이미 제약의 해부(1583)의 저자 P. 스터브스는 극장연극을 비방하고, 가면극을 가장해서 도둑, 매음, 살인 등이 크리스마스처럼 횡행하는 시기는 없다고 기술하였으며 17세기의 어느 퓨리탄은 <크리스마스는 주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바쿠스신의 축제이다. 이교도는 이를 보고 예수는 탐식한 향락주의자, 음주가, 악마의 친구라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한탄하였다. 온건파는 지나친 행동을 시정하는데 그쳤다고 합니다.

장기의회도 크리스마스에 간섭할 마음은 없었는데 1644, 그들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교회의 압력에 의해서 태도결정이 강요되었으며 장로파는 1583, 스코틀랜드에서 크리스마스를 완전히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왕의 명령으로 한때 부활하였지만, 다시 크리스마스를 금지하였으며 의회파의 지도자들은 장로파의 크리스마스 금지요구를 잉글랜드에서 실시할 것을 거부하였지만 곧 굴복하였는데 그것은 의회파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만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1647, 의회파는 크리스마스 금지법안을 가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이에 반대하는 폭동이 각지에서 일어나 마침내 가정에서의 크리스마스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왕정복고(1660) 이후의 크리스마스(Christmas)

크리스마스는 다시 교회의 3대 축일의 하나가 되고, 사람들은 이를 자유롭게 축하할 수 있게 되었으나 사회경제상의 변화는 과거에 시골의 지주저택에서 확산된 전통적 크리스마스의 모양을 바꾸어서, 소박한 사람들의 소동도 폐지하고, 종교심도 희박해지게 되었으며 이 변화는 천천히, 불균등하게 진행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 휴일이 제정되고, 대학, 학교, 재판소, 의회는 크리스마스에서 공현제까지를 휴일로 하고, 관공청은 이 기간의 일수를, 다망한 부서는 그 일부를 휴일로 하였으며 일부 사람들은 성촉제(22)까지를 크리스마스로 생각했습니다. 19세기에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노동조건이 매우 가혹해져 크리스마스 휴일은 당일만 해당되었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부유한 가정에서는 화려하게 축하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이를 축하할 비용이 없는 사람들이 증대하여, 크리스마스는 결국 사멸할 것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빅토리아시대의 크리스마스(Christmas)

19세기 중엽, 크리스마스가 부활하였습니다. 그것은 처치스트운동의 시대로, 대영제국의 위광이 가장 확대된 시기였으며 새로운 크리스마스에서는 이웃사랑, 자선이 중시되고, 종교심의 부활에 의한 종교적 측면의 보정이 행하여지고, 그 위에 과거의 화려한 축제의 관습이 빛을 더했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의 축제가 된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 산타클로스, 크리스마스 카드가 도입되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부활하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크리스마스 정찬(디너)이 서민 가정에 진출하였는데 오늘날의 크리스마스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새로운 크리스마스의 성립에 크게 기여한 것은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과 C. 디킨스라고 합니다.

찰스 디킨즈의 <크리스마스 캐롤>을 John Leech가 그린 삽화. 스크루지가 세번째로 유령을 만나는 장면

앨버트 공은 독일에서 크리스마스 트리의 습관을 윈저 성의 가정 크리스마스에 도입하고,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해 몇 가지 문학작품을 공간하여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전하고, 동시에 크리스마스의 존재모습, 물질적 즐거움을 향유하기 위해서 수행해야 할 자선 등의 의무를 가르쳤습니다.

새로운 크리스마스는 급속히 침투하여, 공론가나 반대론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비국교도도 어린이들이 친구들의 즐거움의 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예배당의 일부는 회원이 국교회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한 것을 보고 크리스마스 예배를 개시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비국교도의 태도도 연화하여, 영국국민이 새로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추세에 의해서 단축된 크리스마스 휴일도 복싱 데이(Boxing Day, 크리스마스의 다음날로 이 날에 사용인이나 우편배달부 등에게 축하 선물을 준다)까지 연장하게 되었고 그것은 은행, 관청만이 아니라 19세기 말까지는 일반 상공업 종사자에게도 확대되었고 여기에서 모두가 함께 축하하는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성립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았습니다. 저도 이번기회를 통해 크리스마스(Christmas)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게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가족, 연인과 함께 마냥 즐겁게 보내는 것도 좋지만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알고 뜻깊게 보낸다면 좀 더 알찬 크리스마스(Christmas)가 되지 않을까요?

해피해피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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